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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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안 | 2008/11/20 22:10 | 초컬릿공장 공지 | 트랙백 | 덧글(33)

6학년 아이들과 처음 만났다

교생 때도 기간제 때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6학년 아이들과의 첫만남을 가졌다. 발령받아 6학년이 되었다고 말하자마자 이전 학교에 있던 다른 선생님들 반응은 대개 비슷했다. 처음에는 어머! 로 시작하고 둘째는 거기 가선 그렇게 방글방글 웃으면 안 돼~ 절대 웃지 마요! 였다. 초임에 6학년이라 잘 되었다, 기억에 오래 남을 거다, 첫해에 힘든 걸 해야 둘째 해가 잘 풀린다 등의 말씀을 해주시던 분들도 두 번째는 모두 똑같았다. 절대 웃으면 안돼요. 6학년과는 초반 기싸움이 한 해를 결정해. 애들이 선생님을 기선제압하게 두면 안 돼요. 일주일쯤 먼저 발령이 난 친구는 전화로 농담이 아닌듯 이야기했다. 투사의 기분으로 들어가. 그럼 쪼끔 나아.

학교에 가니 이미 앞문 뒷문에 붙여놓은 풍선이 보인다. 발걸음을 돌려 연구실로 잠시 향했다. 오늘 조금 늦게 들어오라고 했지. 30분이 살짝 넘겼을 무렵 교실로 향했다. 앞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니 친절히 안내한다. 뒷문으로 오세요. 삐걱이며 잘 열리지 않는 뒷문을 힘주어 밀었더니 펑, 하는 소리가 울렸다. 예상했던 일이다. 칠판 가득 낙서와 같은 환영 문구가 써 있고 둘레를 풍선이 빼곡히 메우고 있다. 다른 반 선생님들이 그 반 애들이 7시 반부터 와서 난리였다더라, 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그러나 나는 되뇌었다. 웃지 말기, 웃지 말기. 긴장한 입매는 굳었고 의도한 게 아님에도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러분이 환영회를 해 줄 줄은 몰랐어요. 고마워요.
사무적이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원래 오늘 아침에 선생님의 소개와 우리 반이 앞으로 일 년 동안 어떻게 살지 안내하려고 했지만, 오늘 아침에는 조회가 있다고 하니 중요한 말만 하겠어요. 우선, 인사.
인사의 중요성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1교시에 실과 선생님이 들어오시거든 말씀 없으셔도 자동 인사를 하라고 거듭 거듭 주의를 주고 조회하러 운동장으로 내보냈다. 마지막 아이까지 내보내고나서 방송에서 들려오는 소리. 채널을 4번으로 맞추어 주세요. 앗차, 이 학교는 애국조회를 방송조회로 하던가.
급히 내려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소리나지 않게 풍선의 바람을 빼려 했지면 연거푸 뻥 소리만 내며 터지는 풍선에 포기했다. 풍선을 떼어서 TV 밑에 던져놓았다. 이따가 처리할 테니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1교시가 전담이라 연구실에 있는데 못내 마음이 찜찜하다. 조금이라도 반응을 더 보일 걸 그랬나, 그래도 애들이 열심히 준비한 건데 기뻐하는 척도 안 보인 건 너무하지 않나.

졸업 사진을 찍으러 공원을 이동해서는 일부러 무뚝뚝하나마 농담도 던지고 그랬다. 점심 시간에는 팔이 다쳐 식판을 한 손으로 들지 못하는 아이 것을 함께 들어서 같은 식탁에서 여자 아이들과 먹으며 아무렇지 않은듯 말도 건네고 그랬다.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동학년 선생님께서 말을 건다. 우리 반 반장이 그 반에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섭다고 소문 났어요. 잘하셨어요. 얼결에 칭찬을 받았다. 뒤늦게 찾아오는 생각. 앗차, 그럼 점심시간까지 너무 풀어주었던가.
점심에 아이스커피를 타서 교실에 돌아왔다. 때때로 복도에 나가 복도에서 놀다가 다친다고 복도에서 놀지 말라고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한다. 쉬는 시간마다 몇 번씩 말하고 있다. 이전 학교에서 복도에서 뛰다 넘어져 다친 사람을 보았기에 복도에서 놀게 하기 불안하거니와 복도에서 놀면 다른 반 아이들과 놀아서 우리 반 아이들과 친해지지 않으려거나 최악의 경우 다른 반 아이들과 패거리를 형성하기 쉽다. 그렇잖아도 아침에 작년 5학년 선생님께 당부를 들은 참이다. 내가 교실에 앉아 있으면서 그러니 아이들도 어쨌든 교실에 있다. 한 무리는 교실 앞을 차지하고 앉아 원카드에 도둑잡기를 한다. 4교시 전 쉬는 시간에 물어봤었다. 선생님, 이건 해도 돼요? 아주 짧게 고민하고 대답했다.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돼. 내기가 아니라 단순한 놀이면 해도 돼. 조금 후에 괜히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대놓고 내 옆에서 하고 있는 걸 보니 크게 걱정 안해도 되겠다 싶다. 옆에서 대놓고 나쁜 짓을 할만큼 담이 큰 아이들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느낌일 뿐이지만.
하지만 그걸 하는 것도 몇 명이고 점심 시간이 끝나갈수록 많은 아이들이 교실에 멍하니 앉아 있다. 점심 시간이 5분 가까이 남았는데 벌써 거의 모든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있다. 당최 무엇을 시킬지 몰라 나는 당황했지만 얼굴만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컴퓨터를 켰다. 다음 시간에는 재량 활동을 할 거예요. 그러면서도 내가 그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공기를 못 견디겠다.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내일부터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보세요. 문득 그렇게 말하니 이전 학교 동학년 선생님이 독서지도 하던 방법이 생각났다. 서둘러 덧붙인다. 교실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만화책도 볼 수 없어요. 만화책은 한 달에 5권 이상 책을 읽었다고 선생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만 선생님의 만화책을 빌려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복지 포인트 청구를 어떻게 하는지 알아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세트를 사다 놓아야겠다. 윷과 공기도 가져다 놓아야겠다. 쉬는 시간과 점심 시간에는 아이들이 친구끼리 즐겁게 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지.

재량활동은 컴퓨터였지만 교실에서 사명서 쓰기로 대체했다. 만난 첫날인데 컴퓨터로 놀 시간을 주는 것보다 이게 낫지 싶었다. 사명서가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인디에서 한 선생님이 올려주신 자료를 미리 출력한 것을 보며 아이들에게 지시했다. 좋은 습관 다섯 가지, 나쁜 습관 다섯 가지를 쓰세요.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으면 장점 열 가지, 단점 열 가지를 써도 좋아요. 다 쓴 사람은 갖고 싶은 것 열 가지, 하고 싶은 것 다섯 가지, 되고 싶은 것 세 가지를 적으세요. 그 중에 다섯 가지만 여러분이 평생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르세요. 다섯 가지를 바탕으로 사명서를 쓰세요. 그리고 전 날 미리 썼던 내 사명서를 읽어 주었다. 아이들이 무얼 느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진지한 분위기였다. 시간이 모자라 일기장에 사명서를 써오던가 붙여 오라고 했다. 내 생각에는 갖고 싶은 건 열 가지도 모자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은 갖고 싶은 것도 없다. 열 가지도 못 채워 끙끙댄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엔 과장되었을 테고 풍족하다 말하기엔 쓸쓸하다.
마지막 수학 시간까지 끝내고 청소를 한 후 아이들을 보냈다. 처음에 인수인계를 받을 때에는 학급 규칙이 무엇인지도 몰라 무척 당황했던 게 사실인데 그래도 그 동안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규칙에 따라 살고 있었다. 내가 손대지 않아도 청소 검사까지 검사 당번에게 맡아서 하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기특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업무 설명을 듣고 반 카페에 게시판 설명과 첫 인사를 적고 나니 퇴근 시간이다. 내 책상 정리를 하고 칠판에 내일 아침 활동과 간단하고 짧은 시인 정호승의 동시 한 편을 적고 나니 다섯 시가 훌쩍 넘었다. 수업 준비는 집에 가서 해야지. 집에 가려는데 생각이 났다. 아, 오늘 해야 하는 일을 두 개나 못했어! 집에 가고 있는데 또 생각난다. 시간표를 두고 왔어!
아무리 완벽하고 꼼꼼하려 해도 결국 나는 변하는 게 없구나, 싶다. 이런 사람도 선생을 하려 한다. 이런 사람도 선생이 꿈이었다. 이런 사람이지만 오늘은 어쨌든 꿈의 첫 관문을 통과한 첫날이다. 수고했어, 나.

by 희안 | 2008/06/09 23:54 | 비터초컬릿 일상 | 트랙백 | 덧글(4)

국민의뜻/받들어라

토요일, 촛불집회에 나간 저는 친구와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난 대한민국 국민이 이렇게까지 좌파적인 줄 몰랐어."  그 전날에도 느낀 것이긴 했지만 그건 놀라움을 넘어서 어색함을 주었어요. 정부를 갈아엎고 국가를 전복시키자는 건 그렇게들 좌빨이라고 비웃던 극좌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 아니던가요.
비꼬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이 극에 치달았다는 이야기고, 정부에서 그렇게 부르짖는 배후세력이 따로 있는 게 아님을, 오히려 국민들을 왼쪽으로 밀어내고 있는 배후가 현 정부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이제 현장에서 고시 철회, 협상 무효보다 더 많이 더 크게 더 익숙하게 들리는 구호 "이명박은/물러나라"는.
현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성향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음은 라디오처럼 하도 반복되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집회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아마 현 정부에 대한 반감만을 공통으로 지녔을 뿐 그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상과 성향은 구호만큼 격렬하지도 좌파적이지도 않을 거예요. 오히려 보수적인 국민들이 더 많이 나왔을 거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집회는, 물론 쇠고기가 전부는 아니지만 시발점은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볼 때,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목숨마저 지키는 것도 못하게 하냐며 뛰어나온, 다시 말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 데에 더 중점이 되는 보수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겠지요.(그러니까 현 정권은 보수 정권도 아니란 말입니다. 누가 MB보고 보수라 했습니까.)

그러나, 집회가 설령 '좌파 선동'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여도 목표를 대통령 하야로 잡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저는 대선 전부터 현 대통령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현 정권을 만들어낸, 그렇게 투표를 하거나 투표를 아예 포기한 사람들에게조차 미움을 갖고 있었지만 이 집회의 목적이 대통령 하야가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현 정권이 예뻐서도 아니고 국가의 혼란보다 현 정권의 유지가 중요해서도 아닙니다. 대통령 하야는 대안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테라포밍님이 성공한 시위, 실패한 시위 - 포스트 이명박과 18대 국회에서 명쾌하게 정리함과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제시하고 계시므로, 제가 여기에 무슨 말을 덧붙여도 별로 쓸데없는 첨언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현 상황에서 국민의 정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의 가장 큰 이유는 정권에서 국민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쇠고기 협상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도 국민의 식량 주권과 관계된 중요한 일을 국민의 뜻을 수렴하는 과정이 전혀 없이 정권에서 독단적으로 처리한, '절차적 정당성'에 있습니다. 대운하와 민영화와 학교 자율화 역시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알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분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현 정권은 국민을 섬기겠다고 말하며 섬김의 정치를 논하며 국민의 뜻을 받들지조차 않고 재고할 가치가 없는 소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하야시켜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낼 대안이 없다면 우리는 현 정부에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우리의 뜻을 받들라고, 현 정부에서 말하는 섬김의 정치를 보이라고. 섬김의 기본은 말을 듣는 것 아니겠습니까. 뜻을 받드는 것을 섬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작금의 쇠고기를 위시한 여러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향후 남아 있는 4년 8개월이란 시간 동안, 현 정부에서 또 다시 이런 사태를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노래로 부르던 헌법1조처럼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므로, 정치란 국민의 뜻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또 다시 어떤 문제가 터지더라도 그것이 국민의 뜻에 의하여 해결되는 방향으로 정부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한 요구를 담은 구호를 현장에서 새로이 만들어 외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 나오고 있는 구호는 단순명료하며 우리의 분노와 실망감을 극적으로 드러내기에 좋은 구호이긴 하지만, 그 구호는 실질적인 요구 사항이 될 수도 없도 되어서도 안 됩니다
저는 창의성이 부족한 관계로 머리를 짜내도 도통 뚜렷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더군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구호는 기껏해야 "국민의 뜻/ 받들어라" (내지는 국민의견/수렴하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 좋은 구호가 현장에서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금은 고민을 해야 할 때입니다. 분노를 담은 뜨거운 가슴의 손을 잡고 '우리가 바라는 더 좋은 방향'을 위한 고민이 함께 가야 할 때입니다. 고민 없는 행동은 폭주를 하기 쉽고 이용당하기 쉬움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방향이 없는 달리기는 언젠가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떠올려야 할 때입니다.

by 희안 | 2008/06/03 09:45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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